[삶의 뜨락에서] 얼굴 바꾸는 낱말
먼 나라 어느 도시에 가 있는 현지 기자들이 전하는 소식은 늘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산 너머에 혹은 바다 건너 도시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서 좋고 그 도시의 특별한 모습을 볼 수 있어 좋고 여기는 이런데 거기는 그렇게 살아가는구나 알게 하는 기자의 언어가 재미있다. 그러면서도 ‘어느 도시 통신’이라는 같은 이름의 기사가 어제와 오늘이 또 다른 분위기를 전하고 있어 이름도 나이를 먹나 철이 들어가나 혹은 늙어가기도 하는가 생각하게 된다. 50년 전 뉴욕통신의 기사와 오늘의 뉴욕통신 기자가 전하는 말은 지나간 시간의 부피만큼 달라진 얼굴을 내보이고 있다. 첫 여름 같았던 오래전 어느 시절에 말해지던 편지라는 낱말은 제법 운치가 있었고 가슴이 달달해지는 애틋함이 묻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여름이 가고 뒤에 젊은이들의 여름이 푸른 잎을 살랑거리고, 그때의 하얀 손수건이 손안에 기적 같은 전화기로 바뀌어버린 오늘은 손편지의 정성 같은 것에 겨우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애틋함이나 운치는 이미 너무 느린 속도감으로 눈길을 끌지 못하고 3초를 기다리지 못하는 인내심은 연애편지를 쓰지도 않고 읽지도 않는다. 편지라는 낱말이 그렇게 얼굴을 바꾸고 빨라지는 문화 옆에서 엉거주춤 서 있다. ‘위대한 개츠비’라는 제목의 영화를 화제로 꺼내면 다른 세대의 사람들은 각자 다른 영화를 떠올린다. 화려한 파티의 풍경도 색깔을 달리한다. 첫사랑을 포기할 수 없었던 사내의 얼굴도 상당히 정직하고 속 깊은 순정남에서 약간 피부적인 욕망의 사내 얼굴로 바뀌어 있다. 개츠비라는 낱말이 세월을 타고 와 얼굴을 바꾸고 우리 앞에 등장한다. 자기의 영화를 떠올렸던 사람들은 산 너머 가버린 혹은 옛날로 흘러가 버린 낯익은 화면을 아쉬워한다. 변해버린 얼굴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가버린 자기의 시간을 실어 내는 달라진 낱말의 낯선 얼굴을 슬퍼한다. 살던 나라를 떠나 오랜 시간 다른 나라에서 살아낸 사람들은 자기가 쓰는 모국어 언어가 얼굴을 바꾸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떠나온 나라에서는 그 오랜 시간을 지내는 동안 살아있는 생물처럼 그때그때 맞추어 성장하고 바꾸고 늙고 또는 아주 죽어버린 언어가 되어 달라진 얼굴을 내밀며 거리를 흘러가지만 그 거리에 함께하지 못한 떠나온 자들은 박제가 되어버린 언어를 붙들고 똑같은 얼굴의 낱말을 소중하게 아끼고 있다. 문득 어느 날 모국어의 많은 것이 낯선 언어가 되어 눈앞에 나타난다, 발전된 통신기술이 있어 가서 살지 않아도 떨어져 살고 있음을 느끼지 못할 만큼 가깝게 하고 있지만 여전히 현장이 다른 삶으로는 얼굴 바꾼 낱말이 서먹하다. 붓으로 한가롭게 써내려던 사랑이나 전쟁 전에 불안정한 삶의 사이사이에 끌어내던 사랑이나 전쟁 후에 살아남은 자들이 다시 세운 도덕 속에 피워내던 사랑이나 상처를 잊고 풍요를 이루어낸 고속도로 위에 펼쳐내던 사랑이나 비록 얼굴이 이만큼씩 달라져 있을지라도 그 안쪽에 깊이 품어져 있는 사랑이라는 원래의 따뜻한 속살은 변함이 없다. 한 세대 30년이라는 세월의 간격으로 느끼던 세대 차이를 같은 날 태어난 쌍둥이조차 먼저와 나중이 느끼게 되었다고 웃으며 말할 만큼 빠르게 변화하는 오늘의 세상은 너무나 많은 낱말의 얼굴을 제 마음대로 바꾸어 놓고 있다. 가면을 갈아 쓰듯 변하는 겉 얼굴을 좇아가려고 숨 가빠하기 보다는속 얼굴 속살을 잃어버리지 않고 낱말의 제모습을 지키는 지혜로 잘 보듬어주고 싶다. 안성남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얼굴 낱말 사내 얼굴 얼굴 속살 모국어 언어